경제대공황시기의 고용문제

졸리운_곰 2019.01.28 20:14 조회 수 : 305

“경제대공황”시기의 고용문제

-일반적인 고용사정과 여성의 고용문제 중심으로...-


- 목   차 -


# 시작하며...


   - 경제대공황의 유산


# <본론>


1. 경제대공황시기의 고용과 실업체계


   - 대공황과 노동시장의 변화


   - 대량실업의 지속


   - 회 복


2. 경제대공황시기의 여성들의 고용체계


   - 미국의 일반적인 가정


   - 여성들의 고용체계


# <결 론>






<시작하며...>


#. 대공황의 유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모습은 여러 모로 대공황 이전과 달랐다. 명백하게 대공황을 경험했기 때문에인지, 아니면 여타의 다른 요인들, 즉, 세계대전과 냉전의 효과, 도시화 및 기업규모의 거대화, 기술진보에 대한 반응 때문인지는 뚜렷하게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대공황 이후 정부의 역할에 대한 민간의 인식이 변화하였고 이와 함께 정부부문이 양적.질적으로 확대된 것은 분명하다.

 아래의 그림에서 몇몇 주요국의 정부지출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공황을 기점으로 상당히 단절적인 증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지는데 여타국에 비해 1920년대까지 정부부문이 상대적으로 작아서 급속히 커질 여유가 있었음에 기인한 바도 없지 않다. 정부지출의 크기뿐만 아니라 중앙정부로의 권력집중도 주목해야 할 변화이다. 각국에서 지방정부의 역할이 줄어들고 중앙정부가 담당하는 사업이 늘어났는데 이는 공황회복을 위한 정책과 실업자 및 빈곤층을 구호하는 사회안전망 구축을 중앙정부에서 주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산구성을 보더라도 미국의 경우 대공황을 분기점으로 연방과 지방정부 지출 비중이 교차한다.


 National Employment Act는 연방정부가 국민경제 안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규정을 담고있기도 하다. 이것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민간기대의 확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부개입이 양적, 질적으로 항구적인 증가를 보여 19세기를 풍미했던 경제적 재유주의가 반세기 이상 유보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정부개입의 증대와 이를 지지하는 민간의 인식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형태를 종종 띠었다. 이는 개인주의적 지방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쇠퇴하였음을 말한다.국민적 결속력 강조는 배타적 지방색을 가장 강하게 유지하고 있던 미국에서도 돋보인다. 전쟁이나 침략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애국심 고취와는 달리 대공황은 국민의식의 고조를 가져왔는데 미국은 한 나라라는 것, 경제문제는 국가적 문제라는 것, 공황의 비참함도 국가적이라는 것, 해결책도 국가수준에서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대공황 시절에 경기회복 또는 빈민구호를 목적으로 도입한 제도 개혁들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비슷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는 사실 또한 공황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농산물 가격지지를 위해 경작지 제한 밑 작목할당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AAA의 선례를 따름이며, 세계 각구이 예금보험제도를 채택한 사실도 그 연원을 미국의 FDIC에서 찾아야 한다. 실업보험, 노인연금, 사회보장제도 등도 멀리는 프러시아나 스웨덴에서 모대를 볼 수 있으나 뉴딜 이후에 구체화되어 점차 확산되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본론>


1. 대공황시기의 고용과 실업체계

 

-대공황과 노동시장의 변화

 1930년부터 1939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미국의 연평균 실업률은 18.2%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대량실업의 시대는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것이였으며, 1920년대 번영기의 연평균 실업률이 3.7%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대공황이 야기한 엄청난 변화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노동시장의 변화에 설명되는 가설은 뉴딜의 노동입법, 노동운동의 성장, 기업의 고용정책의 변화 및 장기실업자층의 문제를 토대로 한다.

 1929년 8월의 경기 정점 이후 미국은 1933년 3월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뉴딜정책을 실시하게 될 때 까지 43개월 동안 유례없는 규모의 경기하강을 겪게 된다. 1933년 분기의 실질 국민소득은 1929년 3분기에 비해 33%나 감소하였고 1931년 이후 제조업의 순투자는 6년연속 마이너스 수치르 기록하게 된다. 이러한 경기침체로 인해서 실업자는 29년의 155만명에서 33년에 이르면 1300만명에 육박하는 규모로 증가한다.

-1929-1933년의 고용과 실업-

연도

민간고용

실업자

실업률

1929

46207

1550

3.2

1930

44187

4340

8.7

1931

41305

8020

1509

1932

38028

12060

23.6

1933

38052

12830

24.9

 

 이처럼 이전 시기의 불황에 비해서 전례없는 규모의 실업을 야기한 대공황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다른 여러 요인들 금본위제 통화정책 보호무역 주식시장의 폭락 은행공황등과 함께 이 시기의 노동시장의 경직성 또한 최근의 연구들에서 대공황의 주요한 전파메커니즘으로서 논의 되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대공황기의 노동시장의 경직화- 이는 대체로 임금 경직성으로 귀결된다- 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대공황 이전 시기의 노동시장의 변화가 대공황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동시장의 경직화가 대공황에 미친 영향에 대한 문헌들의 대부분은 대공황 이전 시기에 진행된 노동시장, 특히 임금결정과정으 경직화로 인해서 대공황 초기의 심각한 경기하강과 물가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명목임금은 더디고 불충분하게 변화하였고 이로 인해 대공황을 야기한 수요충격들의 영향이 더욱 증폭되었으며 따라서 이전 시기의 불황들에 비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대공황의 진폭과 실업문제의 설명에 있어서 이러한 노동시장의 변화는 하나의 중요한 설명요소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어떠한 요소들이 이 시기의 노동시장의 경직화에 기여했는가에 관한 분석들이 행해졌는데 기존의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는 이들 요소는 크게 행정부 및 당시의 다수가 지지하던 과소소비론적 이데올리기에 기반한 임금정책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인사부서를 중심으로 한 내부노동시장의 발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제시한 주장으로는 실업에 원인을 모두 완벽하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먼저 집계적인 임금률의 변화에서는 기존의 임금경직성을 주장했던 논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대광황기의 임금의 움직임은 그 이전 시기의 임금의 움직임과 차이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진행된 노동시장의 변화들이 대공황의 증폭에 크게 영향을 미칠 만큼 임금률의 변동을 경직화시켰다는 증거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 대량실업의 지속

 1933년 3월 4일 시작된 뉴딜은 100일 동안 이전 시기의 수동적이고 디플레이션적인 정책체제로부터 국가개입적이고, 인플레이션적인 정책체제로의 분명한 전환을 통해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은 더디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는데 1929년 3분기 수준의 국민총샌산을 넘어서는 것은 대공황의 시작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39년 4분기에야 이르러서야 가능했고 1940년까지도 실업률은 14%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완만한 하락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1930년대 내내 이처럼 놓은 수준에 있었지만, 이 시기 실질임금은 상승을 거듭하여 1939년에는 1929년수준에 비해 46%나 증간한다. 또한 이시기는 뉴딜의 노동관계 제입법과 함께 노동운동이 급진전하고 기업에서의 내부노동 시장 또한 대부분의 기업에 광범위하게 발전하여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노동시장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기에 있어서 진행된 뉴딜의 노동입법들, 노동 운동의 성장, 내부 노동시장의 발전, 장기 실업자군과 실업자구호를 위한 고용창출사업들이 이 시기의 실업 문제를 중심으로 한 노동 시장의 양상에 끼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대공황으로 인해 형성된 장기 실업자군과 뉴딜 입법과 함께 진행된 단체교섭의 확산으로 인해서, 임금-고용계약이 내부자의 이해를 위주로 결정되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 시기 실업 문제의 중심에 있었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이시기에 진행된 제도적 변화들은 이후 제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전후 미국 노동시장의 골격을 형성하게 된다.


 - 회 복

 미국의 경기회복을 논의하기에 앞서서 미국이 겪었던 공황의 특징을 개괄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미국과 다른 주요국인 영국, 독일의 상황을 비교하여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전간기 미국 영국 독일의 경제는 다소 상이한 경로를 밟았다. 미국은 20년대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렸고 따라서 30년대 공황은 미국에 있어 더욱 혹독하였다. 반면 영국의 30년대 공황의 타격이 상대적으로 작았다. 이것은 영국이 30년대 경기가 덜 나뻤기 때문이 아니라 20년대 만성적인 불황에 빠져있었고 이로 인해 침체가 오랜 기간에 걸쳐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과중한 배상부담과 하이퍼인플레이션 등으로 극심한 경기불안정 상태를 겪었다. 위치상으로는 영국과 미국의 중간정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공황을 직면한 미국의 경우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요인을 거시적인 유효수요확장정책에서 찾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재정정책의 경우 실제 재정 수지가 아닌 완전고용흑자 개념에서 볼 때 오히려 30년대를 통틀어 흑자재정기조가 유지되었다. 즉 팽창적 재정정책은 그 결과가 미미해서가 아니고 정책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적인 회복방안이 되지 못하였다.

 금융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가 대종을 이룬다. 물론 연방 준비 위원회가 1933년 이후에도 공개시장매임이나 재할인율 인하 등을 통해 본원통화를 증가시키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비난이 없지 않으나 1933년에서 1937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통화량이 연평균 거의 10%씩 증가하였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고율의 지속적 통화량 증가는 1930년대 초 금융공황의 여파로 통화승수가 줄어들었음을 감안하면 본원통화가 같은 기간 연율 10%이상 증가한 데 기인한다. 연방 준비 위원회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원통화가 급증한 것은 1933년 미국이 금본위제를 이탈하고 달러화를 평가절하한 이후 금의 유입이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며 정치적 상황 때문에 유럽으로부터 자본유입이 커졌기 때문이다.

 통화량이 증가함과 동시에 명목이자율이 낮아졌다. 상업어음 할인율이 1933년 한해에만 2.63%에서 1.25%로 떨어졌고 1934년 이후에는 거의 0%에 가깝게 되었으며 회사채 수익률도 신용평가 순위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1933-36년간 4.5% 수준에서 3.2 수준을 하락하였다. 통화팽창이 이자율 하락을 통하여 유효수요를 증대시킨다는 전달메커니즘을 받아들인다면 명목이자율 보다 투자지출결정에 요인으로 등장하는 사전적 실질이자율을 구할 필요가 있다. 양자의 괴리는 물가상승 또는 하락에 대한 기대 때문인데 물가변동에 대한 기대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만족할 만큼 풀리지 않고 있다.

 최근에 추계된 사전적 실질이자율은 1933년에 급격히 하락하였고 1937년 까지 지속적으로 하강하여 마이너스 값을 보이고 있다. 이자율하락은 고정자본투자와 내구소비재 수요를 자극하여 1933년부터 경기회복을 주도케 하였고 기타 소비재나 서비스에 대한 수요 증대는 그 이후 잇달았다. 이와 같이 유효수요증대가 재정팽창에서 온 것이라기보다 통화량 증가에 의한 이자율 하락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전쟁의 효과도 군비 지출 보다는 전쟁 발발 전 유럽으로부터의 자본유입에 의한 통화 팽창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이제 뉴딜정책을 살펴 볼 것이다. 일반적으로 뉴딜의 정책들은 구호대책, 경기부양책, 개혁조치라는 세 개의 범주로 나눈다. 학자들의 견해는 각양각색이지만 흔히 구호대책은 적어도 당면목표는 달성했다고 할 수 있고 개혁조치는 호불호를 떠나 장기적, 제도적 효과를 가졌으나 경기부양책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산업 부흥법을 보자. 이것은 주당 35내지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시간당 40센트의 최저임금을 보장하며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상대적으로 숙련도가 낮은 고령자 및 연소자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며 또한 아동노동을 통제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평상시면 모르겠지만 대공황기의 이와 같은 입법은 미숙련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시킴으로써 전반적인 임금인상요인만 유발하고 노동시간을 단축시킴으로써 비효율적 노동자의 고용을 증대하여 노동비용만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최저임금제로 인하여 미숙련 노동임금이 인상되자 전반적 임금수준이 상승하여 산업부흥법이 위헌판결을 받기까지 2년 동안에 실업률이 산업부흥법이 없었을 가상적 경우에 비해 무려 5%나 늘어난 효과를 초래하였다는 추계가 있다. 농업 부분에서도 정책 실패의 예가 나타나고 있다. 농업 조정법은 주로 과잉생산과 수요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작지 감축을 목표로 신용축소정책을 수행한 결과 소작농의 임금노동자화 및 농촌으로부터의 축출효과를 초래하여 산업공황을 오히려 깊게 만들었으며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던 사회문제를 고정시킨 면이 크다는 것이다.

 미국의 뉴딜정책을 대공황 탈피의 기점으로 삼는 설도 많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별정책에 대한 평가는 회의적이다. 이에 대하여 생소한 그러나 설득력 있는 논지를 펴는 학자들이 있다. 뉴딜이 대공황이 지속될 것이라는 민간기대를 반전시키는 체제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정책 수단들의 일관성 부족에도 불구하고 뉴딜정책은 기업가들의 신뢰를 되살렸고 투자지출의 증대를 끌어 냈다.

 아울러 뉴딜정책은 정부의 예산규모를 확대시키고 주정부 지방정부에 비해 연방정부의 비중을 증대하였다. 대공황에 대한 긴급대책으로 정부지출이 폭발적으로 팽창하였고 뉴딜 이후 국민총생산에서 정부지출 차지하는 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정부가 경제 및 사회의 안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자리를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2. 경제 대공황시기의 여성들의 고용체계


 - 미국의 일반적인 가정

 1930년대 미국의 경제 대공황은 대부분의 가정에 혹독한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특히, 공황은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남편의 직업과 소득에 의존하였던 경우에는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많은 경우 경제 공황으로 인해서 생계 담당자로서의 남편과 피부양 가족으로서의 아내라는 전통적 성 역할이 더 이상 수행되지 않았다. 실직한 남성들이 증가하고 그들 스스로가 삶에서 실패하였다는 패배의식에 젖어들면서 가족의 문제점들이 심각하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실직한 남편들은 가출하였고 때로는 알콜 중독자가 되기도하였다. 대공황의 혹독한 현실은 개인 관계에서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성들의 피임이 1936년 합법화되었는데 이 법안의 주요 목적은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워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가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거이었다. 또한 출생률이 급격히 하락하여 1932년에는 최하점까지 내려갔다. 대공황 초기에 젊은이들은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결혼을 신중하게 생각하였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을 연기함에 따라 결혼 연령이 점차적으로 높아졌다.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결혼률은 약간의 증가추세를 보였다.


- 여성들의 고용체계

 미국 대공황기 여성들은 다른 어느 때 보다 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정주부들은 가족의 수입이 감소함에 따라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많은 여성들은 전통적인 방법들을 통해 경제적 위기상황을 극복해 나갔다. 대공황기 여성들의 가사활동은 더욱 큰 의미를 가졌는데 여성들은 일단 소비를 줄이고 옷을 수선해서 입었으며, 집안내 텃밭을 가꾸었고, 재활용을 통해서 가정경제에 도움을 주었다. 여성들의 가사노동은 임금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러한 노동도 경제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경제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대공황기 공식적인 실직률은 30퍼센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공황의 피해가 극심했던 대도시나 농촌지역에서는 더 높은 실직률을 보이기도 하였다. 실직 경우에는 기혼 여성들이나 또한 소수계층의 여성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미혼여성들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많은 회사들이 35세 이상의 여성들에게는 고용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대공황기 남녀 실직률의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했다. 이는 경제적 호황이나 불황기를 불문하고 여성들은 항상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해왔다는 점을 통해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실직률에 대한 통계들은 너무 빈약하기 때문에 대공황기 노동시장에 있어서 여성들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경제적 불황의 분위기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가정으로 복귀할 것을 강요당했다. 남성 노조위원들은 빈번히 여성들이 “남성들의 일”을 차지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여성들로 인해서 남성들의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주장하였다. 기혼여성들에 대한 비난이 가장 심했다. 미국노동총연맹의 집행부에서는 “남편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성의 경우에는 노동고용에 있어서 차이를 두어야 한다고”주장하였다. 1936년 갤럽 폴에 의하면 여론조사에 응한 응답자의 82퍼센트가 “기혼여성은 만일 남편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연방정부에도 적용되었으며 이는 1932년과 1937년 사이에 연방정부가 1천 6백명의 기혼여성들을 해고시킨것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많은 주에서는 과거에 적용되었던 법률을 통해 여성들의 경우는 결혼과 동시에 직업을 그만 두도록 강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고된 기혼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계속해서 노동시장의 문을 두드려야만 했다. 생계 부양자로서의 남편이 실직한 경우 여성들은 적은 수입이라도 가족을 위해 벌어들여야만 하였다. 1930년대 초 정부는 직장을 가지고 있는 기혼여성들을 비난함으로서 높은 실직률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고자 하였다. 고용주들은 남성들에 의해서 대체될 수 없는 직종에 한해서남 여성들을 고용하고 정리해고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전국적으로 모든 주에 걸쳐서 기혼여성들은 정부관련의 직종에서 해고되었다. 그들은 각 학교나 대학 또는 병원의 직원으로 일하다가 해고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동향의 결정타는 1932년 정부 공무원에 대해 발효된 경제법 제32조로 알려진 “기혼자 관계조항”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정부기관에서 정리해고를 시켜야 할 경우 기혼자들이 제1순위가 되었다. 하지만 이 법규는 고용주의 편견에 따라서 편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을 때 소송의 공정성을 가진 의원들은 이것이 기혼여성들에게 끼칠 위험성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이때 하원은 이미 뉴딜을 통과시킨 상태였고, 결국 이 경제법안은 통과되었다. 이 법안의 결과로 2년에 걸쳐 정부는 수 천명의 기혼여성들을 해고 시켰다. 이 법안에 의거한 기혼여성들의 해고는 명목상 경제적 이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고위층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의 부인들이 남편의 비소로 일하는 경우 수입은 연간 5천불에 달하였지만 그들은 이 법에 의해서 해고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당시 여성국에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이 당시 해고된 여성들 중 10명중 9명은 생계를 위해서 직업이 진정으로 필요한 여성들이었다. 이러한 경우는 남편이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생계유지가 어렵거나 그들의 부모나 그밖에 부양할 가족구성원들이 많은 경우였다. 정부기관에서는 아내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남편의 연간 수입이 생계유지를 위한 최저 생활비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때에 따라서 아내보다 적은 수입을 가진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도 있었다.

 기혼여성들처럼 미혼여성들의 경우에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경우는 결혼한 여성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유리한 고용의 기회가 있었지만 남성들과의 경쟁에서는 우선권을 넘겨주어야만 했다. 한 기록에 의하면 1934년 뉴욕 시만 하더라도 7만 천명의 독신여성들이 집 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들의 생활형태는 아침에 직업소개소를 돌며 직업을 찾았으며 오후에는 기차역에서 안식을 취하고 밤에는 지하철을 타고 배회하였다. 그들은 대공황시기 무상으로 배급되었던 치킨 스프로 끼니를 때웠다. 그들 중 몇 명은 다른 실직자들이나 빈곤층의 사람들처럼 그룹을 조직하였다. 비록 회원 수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실직 미혼여성 협회를 조직하여 정부단체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어려운 가정형편상 가출해서 직업을 찾아 나섰던 10대의 소녀들은 매춘부가 되는 것이 그들의 생계를 위해 가장 쉬운 일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1933년 실직한 젊은 남성들을 위한 구호 프로그램인 민간자원 보존단이 마련되었을 때 직업을 찾아서 방황하는 4만 여명의 집없는 소녀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되지 않았다. 연방여성국의 국장으로 있었던 메리 앤더슨은 방황하는 소녀들과 직장을 잃은 4백만의 여성들을 위해서 정부가 어떠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백악관에서 회의가 뒤늦게 개최되었는데 그곳에는 연방 긴급 구호청장인 해리 홉킨스가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깊은 사의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성들은 다른 어느 그룹보다도 적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금 그들을 위한 자금을 마련해 돌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마련되어야 함을 깨닫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것에 대해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대공황기는 그 동안 생계를 어렵게 꾸려가던 흑인 여성 노동자들에게 더욱 힘든 시기였다. 대공황 이전 백인 여성들에 비해 취업률이 높았던 흑인 여성들은 재산도 거의 없는 상태여서 실직을 당해야 했다. 취업 가능한 제조 공장의 일자리와 사무직은 흑인 여성들에게 차단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가내 용역에 몰려들게 되었다. 1930년과 1940년 사이에 가내 노동자는 24퍼센트 정도 증가하였고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1930년 전체 가내 노동자들의 55퍼센트가 유색 인종이었고, 1940년에 이르러 그 비율은 64퍼센트 혹은 거의 2/3에 도달하였다. 연방정부에서 제공하는 실직 보호 프로그램은 그들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행해져 왔던 고용에 있어서의 차별이 계속되었다. 1938년 여성국의 발표에 따르면 흑인노동자 계층 여성들의 10퍼센트는 제조업에 종사하였는데 이는 1890년대 7퍼센트와 비교해 아주 조금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흑인 여성들의 경우 사무직이나 은행원과 같은 직종에 종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백인에 비해서 경제공황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들은 경제적 압박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들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압박에 대해 잘 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백인들의 경우는 흑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훨씬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통계에 의하면 1939년 흑인의 연평균 수입은 백인의 38퍼센트 정도에 해당되었다. 워싱턴에 비교적 중산층의 흑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여성들의 경우 1940년대까지는 정부관련 사무직에 종사할 수가 없었다. 구제 프로그램은 흑인을 차별하였고, 이에 수백 명의 흑인들이 뉴딜의 구제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뉴딜 정책은 여전히 소수그룹인 여성들에게 동등한 혜택을 주지 못했다.



<결 론>

 1930년대 미국의 경제 대공황은 20세기 미국 역사에서 가장 가혹한 시련의 시기였다. 1920년대를 통해 호황을 누리던 미국 경제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공황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공황의 혹독한 현실은 가족관계와 개인에게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실직가장들로 인해 많은 가정은 고통을 겪게 되었고, 또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서 결혼률이 잠정적이나마 감소하였다. 경제적 빈곤으로 인한 심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가족구성원들은 안식처로서의 가정이라는 개념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러한 1930년대 상황 속에서 가정 내 여성들의 가사 노동이야 말로 경제공황의 곤경에서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매우 중요한 경제적 역할이었다.

 대공황기 노동자 실직률 통계에 따르면 점차적으로 남성에 비해 여성의비율이 나타났다. 이는 대공황이 가속화됨에 따라서 여성 노동자에 대한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가 더욱 가중되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미혼 여성들의 해고율이 점차 증가하였다. 남성의 실적에 대한 이유로 여성을 비난함으로써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전문직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을 불러왔던 것이다. 노동시장에서의 차별은 기혼여성과 흑인 여성들에게 더욱 가혹했다. 기혼 여성들은 1932년 발효된 경제법 제23조에 의해 남편이 정부관련 직업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 해고를 당했다. 흑인 여성들의 경우에는 가내 하인만이 가능한 직업처럼 보였다. 더욱이 그들은 실직 보호 프로그램에서도 철저히 소외되었다. 대공황이 지속됨에 따라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의 입지가 남성에 비해 점차 악화되었다. 하지만 대공황의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욕구는 꾸준히 지속되었다. 공황 후 보수적 사회분위기로 인해서 여성들의 가정성에 대한 중요성이 재연되는 가운데에서도, 기혼 여성의 노동 참여가 계속 증가하였다는 사실은 적어도 상당수의 가정에서 가치관이 변화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많은 여성들은 이러한 부당한 조치에 대해 실질 여성 협회 등을 조직하여 끊임없이 반발하였다.

 대공황이 한창이었던 1930년 중반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여성들의 정치적 역할은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루즈벨트 행정부가 도입한 뉴딜 정책은 국가의 본질과 책임에 대한 미국인들의 기본적인 생각을 바꾸어 놓았고, 여성들은 이렇게 정치와 공적생활에 대한 재규정을 시도했던 뉴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중심부에는 시대의 상징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영부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성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해 나아갔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친분관계를 충분히 이용해 정치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여성들이 뉴딜 프로그램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비록 남녀관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전통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나 프랭클린을 대신한 정치적 활약은 그녀를 정치적 인물로 바꾸어 놓았다.

 여성 정치인들은 사적 또는 공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고 이를 활발히 활용하였다. 여성정치인들은 민주당, 아동보호국, 또는 여성국 등을 통하여 여성들의 지위향상에 적극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위한 구제 프로그램이나 사회 보장법 제정에 있어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정치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여성들간의 친분관계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정치 활동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들의 관계는 19세기 사회개혁 운동에 참여했던 여성들 사이에 우정을 바탕으로 한 상호의존적인 것으로서 정치적 관계로 승화되어 그들의 역량을 확대시켜 나아갔으며, 이러한 협동체제는 뉴딜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 동안 미국 여성운동에 대한 평가는 1920년 참정권 획득과 더불어 더 이상 호응을 받지 못했고 1960년대 여성운동이 다시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기까지 오랜 휴지기를 가졌다고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미국 여성들은 1920년 참정권의 획득과 더불어 그 동안 그들에게 금지되어 왔던 정치영역에서의 활동을 서서히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대공황 시기를 맞이하면서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성 유권자 동맹, 전국 소비자 연맹, 여성 노조 연맹, 여성국과 아동국 등의 조직을 통하여 여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1930년대 여성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미국 정치의 전면에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네트워크는 더 이상 사적인 적이 아니었다. 그들의 친분관계로 맺어진 협조체제는 정치적인 네트워크로 승화하였다. 이들은 뉴딜 프로그램의 구체화 작업을 통해서 미국을 사회복지 국가로 만드는데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차후 여성들의 정치적 활동 영역을 확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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