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안보측면에서 고찰한

한국외환위기에 대한 연구




< 목  차 >


Ⅰ. 서론                                                                  1

  1. 연구목적                                                               1

  2. 연구방법                                                               2


Ⅱ. 안보의 개념                                                          3

  1. 국가 안보                                                              3

  2. 안보 개념의 변화                                                       4

  3. 경제 안보                                                              6


Ⅲ. 한국 외환위기의 배경                                               7

  1. 엔-달러 환율변화와 동아시아 경제의 요동                                8

  2. 재벌부도와 부실금융                                                   11


Ⅳ. 한국 외환위기의 발생                                              18

  1. 위기관리능력의 실종                                                   19

  2. 전염효과                                                              21

  3. 외환위기의 발생경로                                                   22


Ⅴ. 외환위기로 인한 국내 산업의 영향                                26


Ⅶ. 결론                                                                 27


참고 문헌                                                               29


<표차례>

<표 1> 국내투자추이                                                       11

<표 2> 외환위기 이전의 97년 기업부도와 금융권 부채                        14

<표 3> 한국의 외채(IBRD 기준) 추이(단위: 억달러)                          16

<표 4> BIS 자료에 기초한 한국의 외채구조                                 17

<표 5> 외국인 주식투자금 유출입 추이                                      23

<표 6> 외환보유고 추이(단위: 억달러)                                       24

Ⅰ. 서론


 1. 연구목적

  

“약육강식의 투쟁상태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이다.” 이 말은 홉스의 대표적인 어록으로, 어느 경우에도 자연 상태에서는 개인의 안전․행복 또는 완성이 불충분하므로, 그 구제․보완 내지 발전으로서 계약에 의한 정치 사회의 성립이 요구된다고 홉스는 말하였다. 이는 곧 국가는 개인의 자연권을 양도받음으로써 개인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하는 의무, 곧 자국의 국민의 안보에 대한 책임을 지우게 된다. 이처럼,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개인, 국가, 국가체제를 막론하고 安全保障이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과거 우리의 반공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교류․협력의 대상인 북한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15日 남북한 정상회담의 발언 중에 "안보와 대한 민국의 정체성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 "안보는 철통같이 해야 한다."라고 연설한 것처럼 국가안보는 국가 정체성의 형성과 유지에 필수적이며, 또한 현실적인 국내․국제 관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개념이며 한 나라의 안보는 국가의 국방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안보의 개념이 점차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힘의 개념이 군사력을 중심으로 규정되던 것으로부터 경제력 및 기타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됨으로써 국제관계의 성격 또한 변화되고 이에 따라 각 국의 대응전략도 변화하고 있다. 최근 경제 측면이 힘의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음은 상대국이 경제 측면에 대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군사력의 정치적 유용성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민주화의 진전과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증대로 경제문제가 정치 문제화되는 현상이 세계적으로 일반화되고 있다는 배경 요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1)

  이러한 상황에서 각 국은 영향력의 확대를 위하여 국내적으로는 경제 역량을 극대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경제 측면을 활용한 외교정책의 추진을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또한 역으로 타국으로부터의 영향력 행사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으로서도 경제력의 확보와 활용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 나라도 또한 국제정치경제의 연계성과 통일외교의 측면에서도 경제안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수단으로서 경제외교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단순한 경제적 논리의 우열이 아니라, 다자․양자 차원에서 국가간의 협상이 필요하므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처럼 경제안보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점을 중심으로 본 논문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를 우리 나라의 경제안보의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안보의 개념 구축을 명확히 해야 하며, 안보개념의 변화와 함께 포괄적 안보 개념으로서 경제 안보의 정의를 내리고, 여기에 따라 외환위기의 발생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한 우리 나라의 산업에 대한 영향 등을 고찰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겠다.


2. 연구방법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본 논문에서는 우리 나라가 맞은 최대의 경제위기에 대해서 고찰하려고 한다. 이 외환위기에 대해 논하기 전에, 안보의 개념의 모호성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먼저, 안보의 개념정립이 필요할 것 같다. 여타의용어처럼, 국가안보도 애매하고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다양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오늘날의 세계화를 반영하는 듯 과거의 안보 개념에서 오늘날의 여러 안보 분야 중, 본 논문이 중심으로 삼고자 하는 경제 안보의 정의를 내려보고자 한다.

  그 다음에 우리 나라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게 된 배경으로 크게 세 가지로 분류를 해서, 국제관계에서의 배경과 국내적인 배경으로 엔-달러 환율변화와 동아시아 경제의 요동, 재벌부도와 부실금융, 외채누적과 단기외채의 급증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단지 배경일 뿐이지 우리 나라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되지 못했다. 외환위기의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은 우리의 위기관리능력이 실종되었다는 것이고, 또 한 나라의 경제가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친다는 전염효과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원인을 한은과 그 외 여러 가지 기관들의 통계와 수치로 자세히 살펴본 다음, 외환위기 발생경로를 조사해 보고자 한다.

  국가부도에 직면할 만큼 총체적인 경제위기라는 말처럼 IMF로 인해 우리 나라의 각 분야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모든 면을 다 총괄할 수는 없으므로, 외환위기가 우리 나라 산업에 끼친 영향을 조사하고자 한다.


Ⅱ. 안보의 개념


1. 국가 안보


  국가안보의 일반적인 사전적 정의는 “물리적 심리적 공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감 또는 안전감을 중요시하는 것” 또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의 내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능력”2)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민족국가의 출현과 함께 현실주의자들에 의하여 정의된 개념이다. 이들은 권력정치 개념에 입각하여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국가안보 위협이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즉 국제정체에서 국가는 각기 안보를 도모하기 위하여 권력을 추구하게 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국제무정부상태에 이르게 되어 안보위기에 빠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안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더 강력한 힘을 추구하기 위하여 군사력 증강에 힘쓰고 군사적 해결에 역점을 두었다.3) 전통적 협의의 안보개념은 단순히 한 국가의 힘을 극대화(maximinization of state's power)하기 위한 국가중심의 군사중심의 안보개념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가 될 수가 있다. 첫째, 안보는 과연 획득될 수 있을까? 둘째, 안보는 항상 바랄 만한 것이고 또 항상 필요한 것인가? 셋째, 어떠한 변화가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것이고 또 어떠한 변화는 가장 덜 위협적인가? 넷째, 누가 안보를 추구하고 유지하는데 책임이 있는가? 다섯째, 안보는 근본적으로 부유한 자와 권력 있는 들에게 적합한 개념인가?

  먼저, 안보란 인간 본성에 관한 입장의 차이에 따라 안보의 획득 가능성이 달라질 수 있다. 군비경쟁을 지지하는 비관적인 입장과 공동의 안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낙천적인 입장에 따라 안보 획득 가능성이 달라진다. 전자의 입장은 현실주의자들의 입장이고, 후자의 입장은 이상주의자들의 입장이다.

  두 번째, 안보는 보편적 선(Common Good)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선이지만 안보만을 최우선으로 할 경우 사회의 다른 가치들이 무시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사회, 경제, 복지 등의 모든 문제를 안보의 관점에서 묘사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안보의 성취는 경직된 자기만족적인 자세를 갖게 한다.

  세 번째, 어떤 변화가 안보에 가장 위협적이고 또 가장 덜 위협적이냐 하는 문제는 안보에 유리한 변화와 그렇지 못한 변화가 있을 뿐이다. 전자는 노동, 에너지를 절약하는 기술이 있을 수 있고, 후자에는 타국의 군비확장과 같은 예가 있을 수 있다. 변화에 대한 지나친 개방은 최소화할 수는 있지만 정체성을 해치는 경우가 발생하고, 너무 폐쇄적인 경우는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성과 탄력성이 떨어지게 된다.

  네 번째, 가장 이상적인 것은 모든 사람이 개인의 안보를 스스로 책임지는 상황이 최선이다. 그러나 그러한 안보구조(security scheme)는 개인적 에너지를 과소비를 유발하며, 또한 비현실적,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집단 혹은 국가가 구성원들의 공공선인 안보를 책임진다. 집단이 더 커지고 덜 응집적이고 더 이질적일수록 개인의 안보 요구보다는 집단의 안보를 우선으로 보호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안보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집단과 가난하고 힘이 없는 두 집단 모두에게 의미가 있다. 단지 두 집단에 있어서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전자에게는 삶의 스타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후자에게는 육체적 생존 그 자체가 안보가 되는 것이다.4)      

  따라서 이를 종합해 보면, 국가안보란 외부로부터의 직접적인 위협이 이 체제, 시민, 그들의 삶의 양식을 위협하는 것을 방어하는 물리적, 심리적 안전의 추구를 포함한다. 그 책임은 국가에게 있으며, 안전을 획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하며, 이념적으로 안전한 탈냉전기 시대에도 위협 - 위협의 유형이 정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며, 한 체제 안에서 나타나는 내적 위협과 체제 밖에서 나타나는 외적 위협 중에서도 외적 위협이 더 중요하다 - 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전시가 아닌 평화시에도 군사력은 중요하다. 결국 국가 안보의 목적은 한 사회의 안전과 생존이므로, 이를 위해 안정(stabilization)이 중요하다.

 

2. 안보 개념의 변화


 그러나 오늘날 현대 산업사회에서 이러한 전통적 국가중심, 군자전략중심의 안보개념은 아주 제한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의 안보문제는 군사력 증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날 첨단과학기술이 발달되고, 국제사회의 상호의존적 관계가 복잡화 다변화되고, 민주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 안보개념도 재정의되고 있다.

  첫째, 국가안보위협은 외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조장될 수 있다. 심각한 반체제운동의 확산, 국민의 이반, 사회적 불안, 요인살해, 혁명, 분리운동, 테러, 마약, 사회범죄의 확산, 심각한 경제침체는 국가안보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국가안보는 내부의 정치, 사회, 경제문제와 직결되어 있어 군사적 안보(military security), 정치적 안보(political security), 경제적 안보(economic security), 사회적 안보(societal security), 환경적 안보(environmental security)등의 포괄적 고려가 필요하다.5)

  둘째, 오늘날의 국가안보는 국제체제차원, 지역체제차원, 국가차원, 정권차원, 개인차원으로 고려할 수 있다. 국제체제와 지역체제의 권력구조와 질서에 역행하는 안보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 국가안보는 언제나 정권안보와 개인안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정권안보가 국가와 개인안보를 침해, 위협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안보는 개인의 안보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국민의 안녕과 행복이 어울려 총체적으로 추구되는 것이어야 한다. 무조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우선주의 또는 정권안보개념은 국민복지를 지향하는 민주국가의 안보개념과는 거리가 멀며 현대 국가가 추구하는 합리적 안보개념도 아니다. 국민이 동의, 지지하지 않는 안보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월남전 반대운동이라든지 미국의 월남에서의 철수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오늘날 핵무기, 미사일, 인공위성 등 첨단과학기술의 발달로, 무차별 대량살상무기의 개발로 전쟁의 발발은 한 국가의 한정된 안보문제가 아니라 공동안보(common security) 또는 상호안보(mutual security)의 관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6) 지역체제와 국제체제의 안정 없이 국가안보의 안정은 있을 수 없다. 이는 냉전시대에 미소 양극의 국제체제가 동북아지역을 냉전구조를 형성하여 분쟁과 긴장을 고조시킨 바와 같다.

  국가안보연구는 지역체제와 국제체제의 차원에서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도구나 오늘날 환경문제는 결코 안보문제와 무관할 수 없으며 어느 한 나라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인류공멸을 자초할 핵전쟁이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생태계와 우주의 환경문제는 인류공동의 안보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넷째, 따라서 오늘날의 국가안보문제는 군사전략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포괄적 광의의 안보개념에서 평화시나 전시를 막론하고 국가의 모든 능력(국제관계, 정치, 외교, 군사전력, 경제, 사회, 과락, 기술, 역사, 심리, 환경 등)을 종합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창의적, 종합적 정책과학과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7) 

  

3. 경제 안보


  앞에서 살펴보았듯 안보는 한 사회의 안전과 생존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는 것인데, 과거에는 이 안보의 개념이 주로 군사적인 측면에만 부각이 되었지만, 탈냉전기에 접어들고, 이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게 되고, 영토보존을 위한 군사력보다는 폭넓은 실제적 영역을 중요시하는 국제환경의 변화로 인해, 안보의 영역에는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 자원/환경, 정치/문화의 측면까지 포함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냉전의 종식은 많은 면에서 국제적 경쟁을 군사에서 경제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안보라는 개념은 정치적 문제로서 굳게 자리 잡았다. 과거 냉전시대에 안보협력의 그늘에서 가려져 있던 통상문제가 경제우위의 탈냉전 시대에 들어 가시화되고 안보문제는 경제문제와 혼재되었다.8)

  그 이유로는 첫째, 국가가 추구하는 핵심가치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체제가 양극이 분할되어 체제 경쟁적 대립을 지속하던 냉전하에서는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에 대하여 국가를 방위하는 것이 일차적인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범세계적인 경제적 상호 의존이 심화되면서 경제문제가 급격히 부각되는 상황에서 국민의 경제적 복지수준의 유지와 향상이 중요한 국가안보의 가치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업하에 따른 범지구적 환경조건이 악화로 국가에 따라서는 보다 쾌적한 삶을 위한 환경의 유지 및 개선을 추구해야 할 주요 가치로 강조되고 있다.

  둘째, 국가의 독립과 주권의 보호를 위한 위협의 근원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안보위협의 근원으로 여겨져 왔던 적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에 더하여 경제적, 환경적 위협 등이 대두되었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국가간의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된 결과 오늘날 대다수의 국가들은 자국의 경제적 번영을 위해 해외로부터의 원활한 물자나 자금, 그리고 기술의 교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호교류망의 차단은 한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셋째, 국가의 대응능력과 관련된 안보차원의 다층화 현상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정부의 대응능력의 감소현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종래 정부능력을 초월하는 새로운 안보쟁점의 등장에 기인한다. 우선 한 국가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국가들에 대하여 상호의존이 심화된다는 사실은 일차적으로는 관련국 상호간 타방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를 바꾸어 말하면 한 국가가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그만큼 제한된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상호의존이 심화된 적대국간의 안보문제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안보문제를 군사와 경제를 연계시켜 포괄적으로 해석하는 또 다른 이유는 협상전략적 차원의 유용성 때문이다.9) 군사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간 군사부분의 과다투자로 인하여 경제가 취약한 구조를 지닌 일방에 대하여 타방이 경제지원과 협력을 협상칩으로 사용할 경우, 낙관적인 관점에서는 군사대립을 경제협력으로 완화시키거나 궁극적으로는 경제협력의 연장선상에서 군사협력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포괄적 안보’ 개념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안보의 포괄적 개념의 일종인 경제안보의 측면에서, 우리의 1997년도 외환위기를 그 배경과 발생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Ⅲ. 한국 외환위기의 배경


  외환위기(Currency Crisis)란 원화에 대한 매수추세는 거의 없고 달러화에 대한 매수추세만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국내 기업 및 금융 기관들이 대외채무를 결제할 수단인 달러가 부족하여 국가 전체의 지급불능 위기로까지 나아간 상황이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경제적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가 터진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이 물론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거품의 붕괴가 국내의 실물 및 금융위기를 일으키는 것으로 끝나고 외환위기로까지 전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거품이 붕괴하고 외환위기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컸고, 그것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외환위기의 원인과 책임소재를 따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근본적 원인 즉 외환위기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 왜 만들어졌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특히 1995년 중반까지 진행된 엔고(円高)와 외자유입, 그리고 한국정부의 경기부양 정책이 한국경제의 거품발생에 기여한 측면과 이후 엔저에 따른 국제수지 적자의 증대 및 외채누적, 그리고 부실기업 및 부실금융의 발생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엔-달러 환율변화와 동아시아 경제의 요동


  한국경제의 호황과 불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외부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일본엔화의 미국달러에 대한 가치변화이다. 한국경제의 수출의존도가 높고, 한국 수출품의 상당한 부분이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엔의 가치가 올라가면, 즉 달러에 대한 환율이 떨어지면, 한국의 수출이 활기를 띠게 되고, 한국 경제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한다. 이에 비해 엔의 가치가 하락하면 수출에 애로가 생기고, 한국경제 전반에 걸쳐 먹구름이 드리운다.10) 그런데 이 평범하고 잘 알려진 사실이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몇 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일본엔화는 1995년 중반에 이르기까지 급속한 가치상승을 기록했다. 이른바 엔고의 시대가 198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 달러당 145엔에서 출발하여 1993년 초 125엔에 이른 엔고의 행진은 드디어 1994년 10월에는 100엔선이 무너졌고, 1995년 4월에는 80엔선마저 붕괴됐다. 달러의 시대가 가고 엔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전망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외환시장에서는 누구나 달러를 팔고 엔을 사려고 했고, 이것이 다시 엔의 가치를 더욱 상승시켜 엔고 행진을 지속시키고 있었다.

  엔고는, 한편으로 일본경제를 침체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에게는 커다란 축복을 가져왔다. 우선 엔고는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수출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11) 엔고는 또한 일본 자본을 위시한 외국자본이 동아시아의 개도국들로 대거 유입되도록 유인했다. 특히 엔고의 지속에 따른 일본 국내 경기의 침체와 엔의 높은 위상이 일본자본으로 하여금 대거 동아시아 개도국으로 진출하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경제권의 부상은 가시화되는 듯했다. 엔고가 수출증대, 투자증대를 가져와 경제성장을 부추겼고, 이는 다시 외국자본의 유입을 촉진시켜 그야말로 모든 좋은 것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12)

  그러나 그칠 줄 모르고 진행되던 엔고 행진이 1994년 말에서 1995년 초반에 이르러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13)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켄터(Mickey Kantor)대사의 주도 아래 진행된 저달러 정책을 통한 무역수지 적자축소와 일본에 대한 통상압박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의 수출이 증대되면서 미국경제의 성장이 지속되고 실업률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점에 미국은 달러의 하락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인플레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1994년 11월 15일, 1995년 1월 31일, 2월 1일에 걸쳐 연방기금금리를 연속적으로 인상했다. 그 결과 1993년 2.96%이던 금리가 1995년에는 6.0%까지 인상됐다.

  둘째, 벤슨(Lolyd Bentson)재무장관이 물러나고 월가 출신의 루빈(Robert Rubin)이 뒤를 이었다. 루빈은 달러 약세가 월가로부터 자본의 해외유출을 가져와 미국의 금융산업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강한 달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1월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한 것도 달러의 강세를 추구하는데 기여했다. 미국은 또한 1995년 4월의 G7 정상회담을 통하여 달러의 약세가 비정상적이며 점진적 반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일본으로서도 엔고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경기침체에 대응하여 지속적으로 금리를 인하했고, 엔저로의 반전을 통한 수출확대가 경기회복의 관건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미국과의 협조하에 외환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엔화로 달러화를 매입하였다.

  미국과 일본 양측에서의 이러한 노력은 곧 결실을 가져왔다. 1995년 중반 이후 엔화 가치는 약세로 반전되었으며, 그 이후 오히려 급속한 하락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엔의 이러한 급락은 동아시아의 개도국들에게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수출감소 때문이었다. 엔저는 일본의 수출을 늘리는 것과 거의 비례해서 주변국들의 수출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엔고시절 막대한 투자를 통하여 설립한 생산시설들이 엔저의 도래에 따라 상품수출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었고, 이는 곧 과잉투자, 부실투자의 문제를 제기할 것이 당연했다. 동아시아의 운명이 상당한 정도에 있어서 엔-달러의 상대적 가치변화에 달려   있었다.

  한국경제의 운명도 엔의 급등과 급락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엔고에 따른 동아시아 개도국의 수출증대, 투자증대, 성장률 증가는 한국의 경우에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1993년 이후 1996년에 이르기까지 한국경제는 활황국면을 구가했다. 일인당 국민소득 1만불을 달성했고, 세계 11위의 경제규모로 OECD 가입협상을 하였다. <표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994-1996년 사이에 설비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이에 힘입어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룩됐다. 그러나 저축률을 앞지르는 투자율과 국제경쟁력 약화에 따른 수축증대의 둔화로 무역수지의 적자가 큰 폭으로 증대하기 시작했다. 1995년에 47.5억 달러였던 무역수지의 적자는 1996년에 153.1억 달러로 크게 증대했고, 경상수지 적자는 같은 기간에 89.5억 달러에서 237.2억 달러로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96년 후반기에 접어들면 경제위기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제기되고, 특히 정부의 개입을 통한 환율의 인위적 인상 필요성을 둘러싼 논란이 일어났다. 수출증대를 통한 경제 위기 돌파를 희망하는 기업들은 환률인상(평가절하)을 요구했지만, 환율인상에 따른 엄청난 환차손을 우려하는 금융기관들은 이에 반대했다. 정부내에서는 외국자본의 이탈과 물가상승을 주장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환율인상 반대세력의 우세로 인하여 환율은 1996년 후반기 동안 상승하기는 하였으나 그 폭은 엔화의 대미 달러에 대한 절하율에도 훨씬 못미치는 정도에 그쳤다.14) 

<표 1> 국내투자추이

 

설비투자

기계수주

총국내

무역수지

GDP

 

증가율

증가율

(제조업)

투자율

저축률

(억달러)

성장률

1991

12.1

5.1

3.7

39.1

36.1

-69.8

9.1

1992

-1.1

-2.5

-3.4

36.8

34.9

-21.5

5.1

1993

-0.1

15.7

27.5

35.2

35.2

 18.6

5.8

1994

23.6

25.5

24.0

36.2

35.4

-31.5

8.6

1995

15.8

19.0

19.0

37.4

36.2

-47.5

8.9

1996

8.2

13.0

13.0

38.6

24.6

-153.1

7.1

1997p

-1.5

10.4

10.4

  -

  -

-28.0

5.98


   그런데 무역수지 적자의 증대가 외자유입의 증대로 보전되는 한 경제의 활황국면은 계속될 수 있다. 더욱이 수출이 증가하고 있고 경제가 성장하는 상황에서는 외채의 누적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경제운영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오랫동안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내외 여건의 변화로 수출증가가 둔화되고, 이에 따라 국제수지 적자가 증대되면서 외자유입이 감소하고, 국내수요마저 위축되기 시작하면서 격한 경제위기의 도래가 임박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엔의 급락은 동아시아 개도국들의 바로 이러한 상황을 초래했고, 한국경제는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1997년에 접어들면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지난 2-3년간의 투자가 상당부분 과잉투자였고, 이것이 경제적 거품을 만들면서 단기적으로는 고용증대, 임금상승, 소비증대, 생산증대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엔저에 따른 수출둔화와 국내시장에서의 높아진 경쟁은 기업들의 수익률을 급감시켰고, 그 결과 연이은 기업도산 사태가 초래됐다.15)


2. 재벌부도와 부실금융


  국제 금융기관들로부터 차입을 하는 주체는 대부분 국내외 금융기관들이고, 이들의 주요 고객은 재벌기업들이다. 그런데 재벌들이 부도로 쓰러지고 그 여파로 국내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면, 어느 외국은행이 국내 은행들에게 대출을 해 주겠는가? 따라서 1997년 외환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재벌들의 과도한 차입경영과 부실한 투자,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국내 금융기관들의 무분별한 대출에서 발견된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기업운영, 금융관행이 가능했는가? 앞에서 엔고와 외자유입이라는 국제적 환경이 국내경제에 거품을 만들고 붕괴시키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여기서는 한국경제의 성장모델로 흔히 지적되는 국가주도적 경제운영의 틀, 그 중에서도 특히 정부, 금융기관, 재벌을 연결하는 유착관계가 경제거품을 만들고 붕괴시키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개발년대를 통하여 한국정부는 금융기관에 대한 지배와 재정자금을 이용하여 수출산업을 육성하는데 자원을 집중적으로 배분하였다.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신호에 따라 자금을 중개하기만 하며 되었다. 재벌들은 독과점적 시장구조와 부호무역의 온실 속에서 다양한 수출지원의 혜택을 입으면서 덩치를 키우기만 하면 되었다. 이러한 성장모델이 고도성장을 이룩하는데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우리의 경험이 말해 준다. 물론 주기적으로 위기가 닥쳐오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함께 인수합병이 이루어졌고 재벌들에게는 이것 또한 손쉽게 덩치를 키울 수 있는 기회였다.16)

  그러나 이제 누구도 이러한 개발년대의 성장모델이 유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부의 개입이 비효율적 자원배분과 부정부패의 만연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재벌이나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정부의 구제를 믿고 무책임한 경영을 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나았기 때문이다. 재벌의 차입, 상호출자, 채무보증을 통한 덩치 키우기는 사회적 형평성, 경영의 효율성 문제를 넘어서 금융기관의 안정성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한국경제 전체를 볼모로 잡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부실채권의 무게에 허덕이는 금융기관들은 국민이 직․간접적으로 부담하는 한은특융과 재정지원이 없이는 금방 쓰러질 운명에 처해 있다. 금융기관들의 비합리적인 자금운영에 따른 부실의 책임을 국민이 알게 모르게 떠맡는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금융불사의 신화 속에 재벌과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했다. 정부가 여러 가지 이유로 덩치 큰 재벌의 붕괴를 용인할 수 없는 보험자 역할을 계속하는 한, 재벌 입장에서는 일단 덩치부터 키워 놓자는 유인을 갖게 되고, 그 결과 이른바 문어발식 확장, 비관련 다각화의 현상이 초래되었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는 재벌개혁을 통하여 이러한 폐해를 고쳐 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재벌들을 소수의 업종을 중심으로 하는 전문 대기업 체제로 개편하기 위하여 추진된 업체/업종 전문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재벌들에게 여신규제를 완화시켜 주어 덩치키우기를 도와주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했다. 더욱이 정부 규제 완하가 요란스럽게 추진되는 가운데 경기부양 위주의 경제정책이 추구되면서, 개별 재벌들은 끝없는 팽창욕으로 과잉 중복투자를 일삼았다.17)

  그러나 재벌들의 이러한 몸집 불리기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재벌들의 차입경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투자에 따른 수익이 대내외적으로 실현될 수 있어야 했지만, 1996년 중반 이후 한국경제는 뚜렷한 위기의 징후들을 노출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엔저는 한국의 수출경쟁력을 둔화시켰고, 무역수지 적자의 증대가 경제운영의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수입개방과 규제완화에 따른 국내시장에서의 경쟁증대도 기업들의 이윤률을 감소시키는 작용을 했다. 임금상승과 금융비용 부담도 기업의 영업이익을 감소시키는 요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표2>에서 보는 것처럼, 1997년 들어 일련의 재벌 부도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했다.18) 1월 달의 한보철강에 이어 7월 15일에는 재계 서열 8위이자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기아마저 부도를 냈다. 이러한 일련의 재벌부도사건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눈덩이처럼 증가시켰다. 부실채권의 규모가 특수 은행을 포함한 은행권이 96년 말의 14조 8천억에서 97년 6월 말에 21조 9천억 원, 9월말에 28조 5천억 원으로 늘어났고, 종금사의 부실채권은 96년 말 1조 3천억 원에서 97년 10월  말에는 3조 9천억 원으로 늘어났다.(한국은행 1998년 1월:11-12). 그 결과 한국 금융기관들에 대한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평가등급이 하향 조정되기 시작했다. 금융차입과 외자유입에 기초한 거품경제가 붕괴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표 2> 외환위기 이전의 97년 기업부도와 금융권 부채

재벌/기업

부도일자

재계서열

금융권부채

한보철강

1.23

14위

4조 9천억원

삼미

3.18

26위

1조 899억원

진로

4.21

19위

1조 9천억원

대농

5.19

33위

1조 7천억원

한신공영

5.30

50위

1조 9천억원

기아

7.15

8위

9조 5300억원

쌍방울

10.15

 

8300억원

태일정밀

10.15

 

8582억원

  이와 같은 잇따른 재벌부도와 누적되는 금융부실은 정부-재벌-금융의 유착관계가 빚어낸 결과일 뿐만 아니라 이에 기초한 경제의 운용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부실재벌과 부실금융의 문제를 정부의 힘으로 해결하기도 어렵게 되었지만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가 재벌과 금융기관의 부실을 뒷처리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한 그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으로부터의 탈출도 결코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선단식 경영으로 계열기업 중 하나가 부실하게 되면 다른 계열기업들이 지원함으로써 망하지 않게 하였고, 그 결과 그룹 전체의 부실이 염려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재벌그룹이 부도나면 관련 은행들과 하청기업에 주는 엄청난 충격 때문에 국민경제 전체가 휘청거릴 것이 명백했다. 재벌은 이러한 위험을 역이용하여 부실경영의 책임을 지기는 커녕 망하게 하려면 해 보라는 식의 행동을 했다. 정부와 금융기관이 부도유예협약, 협조융자와 같은 이름으로 망한 재벌을 망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여 장래의 피해규모를 늘리면서 당장의 어려움을 피해 가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위기의 근원은 치유되지 않고 더 큰 위기의 씨앗을 뿌리는 미봉책으로 그저 덮어두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망해야 하는 기업이나 금융기관을 망하지 않게 하면 국민경제 전체가 망하게 된다. 한국의 외환위기가 일어난 배경에는 이와 같이 여전히 청산되지 않았던 정부-재벌-금융을 잇는 유착관계가 존재했다.


3. 외채누적과 단기외채의 급증


  실물경제위기와 금융위기가 외환위기로 발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특정 경제가 국제금융의 흐름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해외차입, 외국인 직접투자와 주식투자, 환투기 등의 방법들이 사용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단기외채의 비중이 매우 높은 열악한 외채구조와 급속한 외채누적이 잠정적인 외환위기의 배경을 형성했다.

  우리나라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총 456.6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이 중 무역수지 적자가 241.4억 달러였고 215.2억 달러는 무역외거래에서의 적자였다.19) 이러한 적자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1996년까지 환율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해외자본의 유입이 증대되면서 종합수지가 거의 균형을 이루거나 약간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외환시장에서 달러의 수요와 공급이 경상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상수지의 적자는 대개 외채의 누적으로 연결된다. 경상수지 적자만큼 외국인 직․간접 투자자금이 유입되지 않는 한 외자도입으로 적자를 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추진과 더불어 우리 나라의 금융기관들과 기업들이 활발하게 해외에 진출한 것도 역시 외채증가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부의 금융규제 완화와 더불어 해외활동이 용이해진 금융기관들이 높아진 국제신인도를 활용하여 쉽게 저리의 외국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위험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해외영업활동을 벌였다.20) 그 결과 단기간에 매우 많은 외채의 누적이 초래됐다.

<표 3> 한국의 외채(IBRD 기준) 추이(단위: 억달러)

 

1985

1989

1993

1994

1995

1996

1997

총외채

467.6

293.5

487.7

787.4

1,046.9

1,208.0

1.408.4

대외자산

112.2

264.6

360.0

465.4

613.8

699.8

-

순외채

355.4

30.1

78.7

103.1

170.6

347.2

-

  <표 3>이 보여 주는 것처럼, IBRD 기준에 따른 우리 나라의 총외채는 1980년대 후반 감소하기 시작해서 1985년의 476.6억 달러에서 1989년에 293.1억 달러로 감소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3년에 438.7억 달러를 기록했고, 1995년에 784.4억 달러, 1997년에는 무려 1,208억 달러에 이르렀다. 물론 대외자산도 급속히 증가하여 1996년에는 700억 달러에 이르려, 이를 제외한 순외채는 1996년의 경우 347.2억 달러였다.

  그런데 IBRD 방식에 따른 총 외채의 집계는 IMF 방식에 따른 집계의 경우보다 외채의 규모가 적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전자의 방식으로 할 때 총 외채에 포함되지 않던 국내 은행들의 해외지점 차입금과 국내 금융기관들이 역외에 설치한 역외펀드들이 해외에서 차입하여 운영하고 있는 역외 금융이 후자의 방식에 따른 대외지불부담금 집계에는 포함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1997년 12월에 외채통계방식을 발표한 1997년 11월 말 현재 한국의 총 대외지불부담금은 1.569억 달러였는데, 이 액수는 기존의 IBRD방식에 따른 총 외채 1,161억 달러에다 국내 은행 해외지점 차입금(209억 달러)과 역외금융(198억 달러)을 더한 액수이다.21) 그러나 이러한 외채집계방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총 대외지불부담금에서 대외자산을 뺀 순 외채는 IBRD 방식으로 했을 때와 비슷하게 555억 달러로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해외점포 차입금이나 역외금융으로 늘어난 외채의 대부분이 대외자산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지난 몇 년 간 단기자본을 위주로 급속한 외국자본의 유입과 이에 따른 외채의 누적을 경험하였다. <표 4>는 국제결제은행(BIS) 자료에 기초하여 이러한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우선 외국자본의 순 유입을 보면 1994년 하반기에 85억 달러, 1995년 전반기에 148억 달러, 1995년 하반기에 61억 달러, 1996년 전반기에 105억 달러, 1996년 말까지의 2년 반 동안에 무려 519억 달러의 외국자본이 은행대출을 통하여 우리 나라에 유입되었다. 연평균 200억 달러가 넘는 규모이다. 이는 우리 나라의 연간 경제규모를 4,000억 달러 가정하고 투자율을 35%로 잡을 때 연간 총 투자액이 1,400억 달러가 되는데, 이것의 15% 이상이 외국은행으로부터의 대출로 충당된 것임을 의미한다.

  <표 4>는 또한 우리 나라 외채구조의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나라가 단기외채의 비중이 세계 전체의 평균적인 수준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계 전체적으로 보면 단기외채의 비중이 대략 55% 정도인 데 비해, 우리 나라의 단기외채 비중은 70% 정도에 이르고 있다. 또한 우리 나라는 은행권의 외채비중이 세계 평균보다 월등히 높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전체로 보면, 은행권의 외채가 각국의 총 외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략 43 %인 데 비해, 우리 나라는 그 비중이 65 %에 이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외채구조는 기간별로는 단기외채의 비중이 월등히 높고, 차주로는 민간기업이나 공공부문보다 금융기관의 비중이 매우 높다.


<표 4> BIS 자료에 기초한 한국의 외채구조

시기

총외채

순자본유입

단기외채비중

은행권의 비중

 

십억달러

십억달러

한국

세계전체

한국

세계

1994.6

48.1

 

72.5

53.7

66.4

40.2

1994.12

56.6

8.5

70.9

53.4

65.4

39.3

1995.6

71.4

14.8

72.0

55,5

66.6

41.5

1995.12

77.5

6.1

70.0

55.3

64.4

43.4

1996.6

88.0

10/5

70.8

55.5

65.9

43.6

1996.12

100.0

12.0

67.5

55.1

65.1

43.3

1997.6

103.4

3.4

67.9

56.3

59.4

43.3

1997.12

94.2

-9.2

63.1

54.9

60.1

44.4

  

  이러한 우리 나라의 외채구조가 외환위기의 발생에 대하여 주는 영향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기외채의 비중이 높을수록 국제적 신인도의 갑작스런 붕괴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단기외채는 그 성격상 채권자들이 금방 회수해  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국제신인도 하락은 곧 외환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둘째, 은행권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곧 외환위기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금융부실은 곧 금융기관들이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릴 것이고, 그 결과 해외차입이 곤란해지면 금융위기가 곧 외화위기로 발전한다.


Ⅳ. 한국 외환위기의 발생


  앞 절에서 지적한 한국 외환위기의 배경은 그 개연성을 가리키는 것이지 외환위기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러한 배경은 우리 나라에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재벌과 금융의 부실, 국제수지 적자와 외채의 누적은 어제  오늘에 만들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외국자본이 우리 나라에 계속해서 유입되는 한 외환위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외채가 늘어나고 그에 따른 부담과 위험이 증가할 따름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다. 문제는 거품이 언제, 어떻게 터지느냐 하는 점이다.

  1997년 초부터 한국 외화위기의 가능성을 지적하는 많은 보고서가 나왔다. 실제로 8월 초에는 다수의 금융기관들이 외화부도의 위기에 직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997년 9월까지만 해도 외화위기는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22) 그 이유는 우선 외화보유고가 300억 달러를 넘는 상황에서 금융기관들의 외화 차입선이 어느 정도 막혀도 버틸 수 있었고, 외국자본의 유입도 줄어들기는 했지만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초 한 경제신문은 “외자유입 여파 외채급증"이라는 제목으로 97년 1월에서 8월까지 도입된 중장기 외채가 59.6억 달러였고, 9월에만 24.8억 달러에 달했다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기차입에 대한 가산금리도 9월초 1.0%를 상회하다가 하순에는 0.7-0.8%로 떨어졌다고 보도하고 있다.(한국경제신문 97.10.8 및 10.14). 1996년 말에서 1997년 9월 말까지 우리 나라의 총 외채는 99억 달러가 늘고 있다. 그리고 이 중 59억 달러는 장기외채였고 40억 달러는 단기외채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10월 달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외화위기를 맞았는가? 이것은 국제신인도의 갑작스런 붕괴와 외국자본의 탈출이라는 요인 이외의 것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즉, 한국의 외화위기는 앞서 제시한 배경하에서 국제 금융기관들이 한국에 대한 대출한도를 갑자기 줄이고 한국에 투자한 자본을 회수해 가면서 발생했다. 다시 말하면, 외국자본이 기존의 단기외채에 대한 상환연장을 거부하고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본을 회수해 가면서 한국의 외화위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 시점은 대략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로, 외환위기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했다. 물론 환율은 9월 달부터도 오르기 시작했고 10월에 접어들면서 단기외채의 상환연장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초까지만 해도 한국이 태국과 인도네시아와 같은 외환위기를 겪게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면 왜 갑자기 우리 나라의 국제신인도가 떨어지고 외국자본이 철수하기 시작했는가?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이 실종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로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전염효과가 밀어닥쳤다는 점이다.    

 

1.위기관리능력의 실종


  1996년 말에서 1997년 초에 일어난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사회․정치적 갈등과 한보사태의 정치적 파장은 김영삼 정부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자들의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는 크게 약화되지 않았다. 1997년 3월 이후 7월에 기아자동차가 사실상의 부도를 내기 전까지는 한국정부의 대외신인도는 나빠지지 않았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은 개별 금융기관들이나 재벌기업들에 대한 평가등급을 하향조정하면서도 한국정부의 신용등급은 여전히 높게 유지했다. Moody's는 여전히  ”과거 한국정부가 위기관리를 효과적으로 해 온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번에도 정부가 외채누적을 막기 위해 적절한 경제정책을 시행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표하였다.23)

  그러나 일련의 재벌부도와 금융권의 부실채권이 이미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기아의 사실상 부도는 정부출자기관인 산업은행의 신용등급을 낮추었고, 한국정부에 대한 신용등급도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한국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에 대한 의혹이 커져 가면서 이들이 해외시장에서 차입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정부는 드디어 8월 25일 이른바 “특단의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발표하면서 국내 금융기관들의 대외채무에 대한 지급보증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 선언은 금융기관들의 해외차입과 만기연장을 위해 기여하기보다 오히려 “민간부문의 신용위기가 국가신용위기로 확산되는 공식적인 길”을 터줌으로써 한국정부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제 한국정부의 신용도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의 지불불능도 우려하는 상황으로 사태가 악화될 조짐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24) 기아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시장 안정대책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아문제는 대선정국과 맞물려 더욱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고, 한국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은 점차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정부의 위기관리능력 실종을 보여 준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금융개혁의 좌절과 이 과정에서 드러난 경제기획원과 한국은행의 대립, 그리고 정치권의 무능이었다. 금융기관들의 외화부도 위험이 심각하고 환율안정을 위한 정부의 체계적인 노력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상황에서, 외환관리를 책임진 경제기획원과 한국은행의 대립은 서로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면서 정부의 위기대응능력을 크게 손상시켰다. 여기에 대선 정국에서의 여야간 대립이 중첩되면서 정부는 어느 쪽으로도 정책선택을 결정할 수 없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외환시장의 불안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외환위기를 방지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은 충분한 외환보유고다. 외환보유고가 매우 넉넉하다면 정부는 외환시장의 불안을 강력한 개입을 통하여 잠재울 수 있다. 그러나 외환보유고의 부족은 외환당국간의 힘 겨루기가 계속되는 사이 외환당국의 시장개입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도 못한 채 외환보유고만 위험한 수준으로까지 감축시키는 결과가 초래됐다.

  점증하는 외환위기의 위험 앞에서 한국정부는 전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기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금융개혁에 실패하면서 정부의 권위는 사실상 실종되고 없었다. 이미 권위를 잃어버린 정권 말기의 김영삼 정부는 대선정국의 와중에 사실상의 정치적 마비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어 닥친 외환위기의 전염효과는 엄청난 외적 충격으로 작동하면서 한국을 돌이킬 수 없는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게 했다.25)

2. 전염효과


  특정 국가의 금융/외환위기가 다른 나라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전염효과라고 부른다. 물론 그러한 영향을 가장 강력히 받는 나라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거나 경제적으로 깊은 상호의존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이다. 왜 이러한 전염효과가 발생하는가? 대개 두 가지의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민상기 1998:70-72)

  하나는 경제적인 것으로, 무역과 투자의 관계를 통해서 전달되는 효과이다. 밀접한 무역관계에 있는 한 국가(A)가 외환위기에 빠지면, 상대국(B)은 A국에 대한 수출이 줄어드는 반면에 A국으로부터 수입은 늘어나는 영향을 받게 된다. 또한 제 3국의 시장에서 경쟁관계에 있다면 A국의 위기는 B국의 무역수지를 악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B국이 A국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 경우에도 역시 A국의 위기는 전염된다. 다른 하나의 전염 채널은 이른바 경각효과(Wake-up-call effect)를 통해서이다. A국에 위기가 발생하면 국제금융시장의 참여자들은 B국의 경제상황을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되고, A국으로부터의 부정적 영향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특히 국제금융자본의 이동이 군집현상(herding)을 보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정국으로부터의 자본이탈조짐은 조만간 자본의 대거 탈출사태를 불러와 그렇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위기를 실제로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위기는 쉽게 주변국으로 전염된다. 물론 이때 외환위기국과 밀접한 경제관계에 있거나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이 모두 외환위기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집이나 나무가 많듯이, 외환위기의 전염이라는 강풍이 불어도 실제로 외환위기에까지 빠지지는 않는 나라들도 많다.

  그런데 한국은 동남아에서 시작된 외환위기의 전염효과에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7월의 태국사태로부터 시작된 동남아 외환위기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다, 대만을 거쳐 우리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의 국제수지 적자 확대와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우리 나라 금융기관들의 투자가 부식화될 우려가 컸고, 국내에서도 재벌들의 부도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외국자본이 우리 나라로부터 이탈 조짐을 보였고, 원화의 환율이 곧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환율방어는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남아의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10월 23일에 일어난 홍콩의 단기금리 폭등과 증시의 대폭락(14%)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26) 홍콩사태의 파장은 바로 그 다음날부터 한국의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상승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홍콩시의 폭락이 우리 나라에게 특히 중요했던 이유는 우리 나라가 외국자본을 주로 동원하던 곳이 홍콩이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동아시아로부터 외국자본의 철수가 본격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정부는 10월 29일에 외국자본의 유입을 확대하고 외화의 유출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지만 효과는 실망적이었다

  홍콩사태와 그 파장이 우리에게 미친 또 하나의 결정적 영향은 이 사태를 계기로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이 우리 나라에 대한 신용등급을 본격적으로 낮추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10월 24일 S&P사는 다시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였다. 11월 3일과 4일에 잠깐 상승하던 주가는 11월 5일부터 외국자본의 한국탈출로 다시 하락하기 시작하여 7일에는 38.2포인트(6.9%)나 하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0월 28일의 하락 기록을 갱신하는 사상 최대의 하락폭이었다. 동남아시아 사태에 이은 홍콩의 주가폭락은 외국자본의 한국이탈을 본격화시키면서 한국을 사실상의 외환위기 상태에 빠뜨렸다. 그러면 한국의 외환위기가 구체적으로 발생한 경로를 살펴보고자 한다.

 

3. 외환위기의 발생경로


  우리 나라와 같이 높은 비중의 단기 외채를 중심으로 거대한 외채를 안고 있는 나라의 경우, 국제신인도가 붕괴하면서 단기외채의 상환기간 연장이 불가능하게 되고, 외국자본이 증시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면 외환위기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사태가 실제로 어떠한 경로를 거치면서 외환위기를 가져왔는가? 

  <표 5>에 따르면, 국내 증시로부터 외국자본의 순 유출이 이루어진 시기는 1997년 중 한보사태 이후의 2월부터 4월까지, 그리고 기아사태 이후의 8월에서 11월까지 나타나 있다.(주지하다시피, 2-4월의 순 유출은 1997년 3월의 이른바 미니 외환위기와 관련이 있다.)




<표 5> 외국인 주식투자금 유출입 추이

 

97.1

2

3

4

5

6

순유입

5.6

-0.1

-2.9

-1.1

12.7

8.3

순매수

4,168

-871

-2,154

-1,341

10,900

6,322

 

7

8

9

10

11

12

순유입

2.3

-0.5

-3.8

-7.8

-7.5

3.4

순매수

2,319

-872

-2,905

-9,640

-5,899

4,837

  현 외환위기의 발생과 관련이 있는 8-11월의 순 유출의 규모가 크고, 10월과 11월에 특히 집중돼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국내증시에 투자된 외국자본의 유출이 외환위기의 발생에 기여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홍콩증시 폭락 이후 외국계 투자자들의 동아시아 투자규모 축소가 이어지면서 한국증시에서도 외국인 매도세가 강하게 일어났다.27)

  다음으로, 단기외채의 상환기간 연장이 안 되었던 사실을 확인해 보자. 97년 말  우리 나라의 총 대외지불부담과 97년 중의 변화를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우선 1997년 9월 말까지 증가하던 총 외채가 그때부터 11월 말까지의 2개월 간 137억 달러나 급속히 감소했다. 그런데 이 감소분 중 대부분인 118억 달러가 단기외채의 감소로 나타났다. 특히 국내 금융기관들로부터의 단기차입금 회수가 심각하여 같은 기간 중 126억 달러가 감소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단기외채의 상환기간 연장 불능에 따른 단기외채의 감소가 외환위기의 발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다. 즉, 외환위기가 일어난 10월 말에서 11월 초의 기간을 중심으로 10월과 11월에 우리 나라의 금융기관들로부터 외국자본의 급속한 이탈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국에 대한 국제신인도가 갑작스럽게 붕괴한 가운데 일본과 같이 제 1의 채권국 은행들이 한국으로부터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면 다른 나라의 은행들도 자신을 보호하고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투어 자금을 회수하기 마련이다.28) 외환위기가 현실화되기 전에 다른 은행들보다 먼저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이 누구나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른바 한국으로부터의 탈출 러시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러한 이런바 군집현상은 바로 한국의 외환위기를 재촉하고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한국이 외환위기의 발생을 막기 위해서는 충분한 외환보유고가 필요했다.29) 그러나 우리 나라는 외환보유고도 부족했고, 국내 은행의 해외지점에 상당액을 예치함으로써 그 운영에도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외환위기가 닥쳐왔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용외환보유고가 턱없이 부족했고, 이는 다시 우리 나라의 신인도를 떨어뜨려 외환위기의 도래를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적정 외환보유고의 규모와 외환보유고 운용을 둘러싼 논란이 존재한다. 그리고 외환보유고를 사용하여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옳았는가 라는 논란도 존재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과도한 단기외채를 지고 있는 상황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가용 외환보유고의 규모가 적었다는 사실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단기외채의 상환연장이 어려워지면 외환위기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표 6>은 1997년의 월별 외환보유고 추이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첫째, 외환보유고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는 사실이다. 흔히 거론되는 IMF의 권고 수준은 3개월 분 수입액으로, 이 기준으로 보면 우리 나라의 적정 외환보유고는 대략 360억 달러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이미 이 수준에도 크게 미달하고 있었다. 더욱이 우리 나라의 경우 단기외채의 비중이 세계의 평균적인 수준보다 매우 높은 사실을 고려한다면, 외환보유고의 수준이 더욱 높아야 했다. 그러나 <표8>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97년 초의 한보사태 이후에 발생한 미니위기로 일단 외환보유고가 감소하였는데, 8월부터 시작된 동남아 통화위기에 따른 환율 불안에 대처하기 위하여 외환보유고를 사용함으로써 외환보유고 수준이 더욱 낮아졌다.

 

1996

1997.1

2

3

4

5

6

총외환보유고

332.4

309.7

297.6

291.5

319.0

333.2

345.2

해외점포유치금

38.2

38.4

80.1

80.1

80.1

80.1

80.1

기용외환보유고

294.3

271.5

271.4

211.4

218.2

239.4

253.1

<표 6> 외환보유고 추이(단위: 억달러)


  둘째, 흔히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외환보유고 관리상의 문제점이다. 국내 외국환은행의 해외지점에 대한 영업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명목으로 1996년부터 외환보유고의 일부를 예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제도는 가용 외환보유고의 감소에 크게 기여했고, 결과적으로 외환위기가 닥쳐왔을 때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외환 당국의 능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특히 이 제도는 악용의 소지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해외지점이 외화부도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은행이 외환보유고를 사용하여 막아 주었음에도 총 외환보유고의 감소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실제적으로 외환보유고를 사용하여 해외지점의 외채를 상환하였음에도 외환보유고로 계산되는 것이다.

  동남아 외환위기가 발생한 7월부터 우리 나라의 환율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증시로부터 외국자본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기업이나 개인들이 달러를 보유하고 사재기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환율을 안정시키려고 하였는데, 8월 - 9월에는 몇 차례의 시도를 통하여 어느 정도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8월 20일 정부는 환율을 897-898원 수준에서 방어하기로 결정하고 외환보유고에서 달러를 무제한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8월 25일에 900선이 무너졌다. 8월 27일에는 환율이 905원에서 방어하겠다고 발표했으나 9월 4일에는 다시 이 선마저 붕괴됐다. 그러나 이후에는 환율상승세가 주춤하면서 9월의 외환위기설은 일단 무사히 넘겼다. 그런데 외환보유고에 기초한 이 때의 정부 개입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9월까지만 해도 외자도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는 데도 외환보유고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10월 하순에 들어 다시 환율상승 압력이 나타났을 때 외환당국이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때에도 정부는 환율방어선을 계속 후퇴시키면서 방어를 위해 개입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10월 20일 915원선을 포기한 정부는 10월 24일 930원 선을 마지노선으로 설정하고 개입했다. 그러나 10월 27일에는 다시 후퇴하여 940원대를 방어목표로 설정했으나 이것마저 하루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0월 28일 오전에 환율이 가격제한폭인 957.6원까지 오르기 시작하고, 무디스사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은행은 11시쯤 현물환, 선물환 등 매도대기물을 회수하여 환율방어를 포기했고, 외환거래는 일시 중단되었다.

  정부는 10월29일과 30일에 환율방어를 위한 금융시장안정대책과 그 후속조치를 통하여 외화의 매입 자체를 실수요자 위주로 극히 제한함으로써 외화수요를 축소하는 대신,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확대, 채권시장 조기개방, 현금차관 도입확대 등을 통하여 외화유입을 촉진하는 조치를 실시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외환시장에 하루 20억 달러씩 개입하여 환율안정을 시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1월 3일에는 외국인 주식투자한도가 확대되는 첫날로서 오전 중에는 외국인의 매수 우위 유지로 한 숨돌리는 듯했고, 한은도 적극적인 시장개입으로 970원 이하에서 환율을 방어했다. 특히 재경원은 기업과 은행들에게 달러매입자제와 보유달러의 매도를 요구하는 강압적인 수단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1월 5일부터 환율과 금리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고, 11월 7일에는 주가마저 사상 최대로 폭락하고 환율과 금리가  급등하기 시작함으로써 금융 외환시장은 악순환에 빠져들었고, 이후에는 사실상 한국정부의 자립적인 해결은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한은이 환율방어를 위해 달러를 매도하고, 민간금융기관들이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달러를 사들이면, 시중자금은 한은으로 흡수된다. 이에 따른 자금경색으로 이자율이 급등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되는데, 이를 막기 위하여 자금을 공급하면 이는 다시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는 데 들어가고, 그 결과 환율은 상승한다. 따라서 환율상승, 주가 폭락, 금리 급등의 악순환을 이루게 된다. 외환위기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11월 7일 이후에도 정부는, 한편에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외환시장에 무모할 정도로 적극 개입하여 환율안정을 시도했으나 돌이킬 수 없었다. 11월 7일 오전 986원에 방어선을 쳐 놓고, 3억5천만 달러를 매도했으나, 이마저 붕괴되자 오후에는 매도물량을 회수함으로써 환율방어를 완전히 포기했다. 이제 남은 길은 IMF의 구제금융을, 그것도 외환보유고가 거의 고갈된 상태에서 국가의 외화부도가 임박한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Ⅴ. 외환위기로 인한 국내 산업의 영향


  바로 앞에서 살펴보듯, 1997년 외환위기는 국내외 여러 원인들이 상호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하였다. 그 결과 IMF의 영향이 우리 사회 곳곳에 안 미친 곳이 없을 정도였다. 한국경제는 국가부도 직전에까지 몰리기도 하여, 우리 국민의 금반지, 목걸이, 다이아몬드까지 팔아서 부채를 갚자는 운동도 벌이기도 했었고, 대부분의 경제지표들이 그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기록적인 수치를 보여준다는 사실에서도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주었다.

  먼저 국내 소비는 전반적인 경기하강이 지속되고 물가가 불안하여 IMF 지원 체재하에서 금융 및 실물 경제의 구조조정이 급격히 이루어져 실업이 100만 명을 돌파하였고, 근로자들의 임금이 동결되거나 오히려 억제가 되었다. 이에 비해 IMF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 정부 지출은 급감했었다. 따라서 국내 소비가 위축되었었고,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기업분할 매각, 부실기업 퇴출, 국내외 기업간의 M&A등이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정부지출의 삭감과 함께 각종 지원제도의 개편이 불가피하여, 선별적인 지원정책이 크게 축소되어, 취약 산업에 대한 지원이 대폭 위축되었다. 또한 불요불급한 SOC사업이 축소되었고, 문화․교육․의료․복지 등의 예산이 삭감되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IMF로부터 금융지원 대가로 그 동안 미, 일, EU가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금융시장의 완전개방과 수입선다변화제도의 폐지 약속을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가 떨어져 수출전선에 문제가 많았고, 대외신인도가회복될 때까지 외화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금융기관의 단기원리금 상환을 위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IMF 자금 지원을 받고도 외화공급이 부족하였다. 이에 환차손에 의한 부담이 커 원유, 수입 원자재등의 가격 급등으로 원가 상승 압력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금리는 일부 금융기관들의 퇴출과 영업정지, M&A 등으로 금융기관들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시중의 자금이 핍박해져 금리가 높아져 고금리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업의 설비투자를 위한 재원확보가 어려워져 전반적으로 금융비용이 증가하여 채산성 확보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외환위기의 직․간접적인 영향하에 있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Ⅶ. 결론


 본 논문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한 과정을 대내적 요인과 정치․경제적 요인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고찰하였다. 엔고와 외자유입의 증대, 재벌주도의 경제구조와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 무분별한 금융개방과 규제완화가 과잉투자와 이에 따른 경제거품의 발생을 초래했다. 1995년 중반 이후 엔저로의 전환과 이에 따른 수출여건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의 투자 붐은 계속됐다. 그 결과 기업들의 수익률이 크게 떨어지고 높은 부채비율에 따른 금융부담으로 쓰러지는 기업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재벌의 부도는 곧 금융기관의 부실을 의미했고, 이는 곧 대외신인도의 하락을 가져와 해외차입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권 말기의 김영삼 정부는 노동개혁, 금융개혁에 실패하고 기아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등 위기관리능력의 실종을 명백히 드러냈고, 동남아 위기에 이은 홍콩의 주가폭락은 한국으로부터의 외국자본 탈출을 본격화시켜 결국 한국에서의 외환위기를 현실화시켰다.

  한국 외환위기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위기 수습을 위해 무엇을 우선시해야 되느냐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 대내적 요인과 정치․경제적 요인이 상호작용했다고 앞에 설명했었지만 우리가 처하고 있는 문제의 책임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달러와 일본 엔 사이의 환율이 어떻게 설정되고, 단기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대한 국제적 감시체제가 어떻게 설립되며, 외환위기 수습의 책임을 국제민간자본이 어떻게 얼마나 부담하게 될 것인가는 우리의 위기 극복을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들이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개진하고, 필요하다면 비슷한 처지의 국가들과 공조도 취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이익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매우 크다.Y

  

 

















< 참고 문헌 >


박복영 (1997), ‘1931년 독일의 통화위기와 1997년 한국의 위기에 대한 시사’, 한                 국사회경제학회 연구논문집(제 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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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사력의 정치적 유용성 감소에는 미소 핵전력의 parity에 따른 상호선제사용억제, 재래식 무기에 의한 제3세계 개입 실패 및 첨단 기술을 요구하는 재래식 무기의 개발 비용 증대 등이 작용하였다.

2) "Natioal Security," in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ed. by David L. Sills(The Macmillan Company & The Free Press, 1980), pp. 40-44

3) E. H. Carr, 2nd ed. The Twenty Years Crisis(London: Macmillan, 1946) pp.157-80

4) Robert Mandel, "The Changing Face Of National Security"(Greenwood Press, 1994), pp. 12-13.

5) Barry Buzan, (ed.) People, State & Fear : an Agenda for International Security Studies in the Post-cold war era (New York : Haevester Wheatsheaf, 1991), p. 19.

6) Report of the Independent Commission on Disarmament and Security Issues, Common Security : A Programme for Disarmament (London: Pan Books, 1982)

7) Berkowitz and Bock, op.cit., pp 325-416

8)  Robert Mandel, The Chasing Face of National Security, pp.35-40

9)  이민룡, 『한국안보 정책론』(서울: 진영사, 1996), p.275.

10)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엔-달러 환율의 변화에 맞추어 원화의 대 달러화 및 대 엔화 환율이 변화하면 수출경쟁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원화의 가치는 다른 동아시아 통화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달러화에 연동되어 달러의 가치변화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경향을 보여 왔다. 따라서 엔화의 달러화에 대한 환율의 변화가 원화의 환율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엔고는 원의 평가절하를 가져오고, 엔저는 원의 평가절상을 가져오는 효과가 있었다.

11)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수출증가율은 1993년 10.4%에서 1994년 15%로, 1995년 20.6%로 급속히 증가했다. 정규재․김성택(1998:291). 한국의 상품수출액은 1993년 820.8억 달러, 1994년 949.6억 달러, 1995년 1246.3억 달러, 1996년 1299.6억 달러, 1997년 1385.9억 달러였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의 수출은 1993년에서 1995년까지는 급속히 증가했으나 그 이후 둔화되었다.

12)  와타나베 도시오(1994)는 엔고가 일본으로 하여금 동아시아지역의 성장축으로 기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13) 이에 대한 논의는 Henderson (1998:68-83) 및 정규재․김성택(1998:292-312) 참조.

14)  1996년 후반에서 1997년 초 사이에 정부 내에서 환율인상을 둘러싼 논쟁에서 한국은행과 청와대 경제수석은 인상을 반대했고, 재경원은 인상을 지지했다.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 재계에서는 1997년 초에 들어 정부의 개입에 의한 환율인상 억제를 강력히 반대했다. 당시 정부는 환율인상을 내버려두는 경우, 환차손을 우려하여 외국자본이 이탈하고, 국내 금융기관들의 외채상환 부담이 증대하고 신규차입이 어려워져 외환사정이 더욱 나빠질 수 있는 부정적 측면과,  환율인상에 따라 수출이 증대하고 국제수지가 개선될 수 있는 긍정적 측면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15)  1996년 우리 나라 30대 재벌의 경상이익률은 총자본 대비 0.6%, 매출액 대비 0.52%였다. 1997년 상반기 제조업의 경상이익률은 1.4%였는데, 1995년과 1996년 상반기이 이 비율은 각각 4.2%와 1.8%였다.

16)  1960년대 말에는 외국자본을 들여와 건설한 다수의 차관기업들이 부실로 드러나면서 경제위기를 맞이하였으나, 8․3조치 등을 통한 사채동결과 금융지원 등 정부의 개입을 통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1970년대 말에는 유신시대의 중화학산업화 드라이브가 빚은 과잉 중복투자와 제 2차 오일 쇼크 및 국제금리상승에 따른 경제위기가 도래하였으나, 1980년대 초 전두환 정부에 의한 강제적인 투자조정, 산업합리화 조치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두 번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세계경제사정의 호전이 역시 중요한 기여를 했다. 특히 1986년-1989년 4년간에는 약 280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가 실현되었고, 외채도 크게 감소했다. 민주화 이후 일어난 투자붐과 소비붐은 다시 국제수지 적자와 외채누적의 결과를 가져왔지만, 1997년부터 본격화된 금융위기, 실물위기에 대하여 과거와 같은 정부개입을 통한 해결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17)  민주화 이후 정부의 재벌개혁 실패와 이에 따른 개별 재벌들의 팽창욕이 전체적으로 한국경제의 붕괴를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자율적인 국가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가운데 개별 자본들의 극단적인 사적 이익추구가 전체의 파멸을 가져온 것이다. 민주화 이후 정부-재벌 관계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는 정진영(1998) 참조.

18)  이러한 재벌들 외에 1997년 중에는 62개의 상장기업이 부도가 났으며, 전체적으로는 17,168개의 기업이 부도가 났다. 이는 1996년에 부도가 난 상장기업수가 6개, 전체 업체수가 11,589개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부도업체수가 크게 증가한 것이었다. 어음부도율도 크게 증가하여 1996년 0.14%이던 것이 1997년 3/4분기 중에는 0.25%, 10월에는 0.43%, 11월에는 0.38%, 12월에는 1.49%로 높아졌다. 한국은행(1998년 1월), pp. 10-12 참조

19)  무역수지 적자의 90% 정도는 원자재와 설비재의 도입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무역외거래 중 기존외채에 대한 이자지금은 1994년부터 1997년 11월까지 대략 90억 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기간 중 우리 나라 기업들의 해외직접 투자액은 123억 달러였으며, 금융기관의 역외자산증가액이 150억 달러, 외국환은행의 대외자산증가분이 205억 달러, 외환보유고증가액이 41억 달러였다. 이러한 내용들이 대략 도입된 외채와 외국인의 국내 투자액을 사용한 내역을 구성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창선(1998. 1. 28). “빌린 외채의 사용명세서,”『LG주간경제』, pp 9-11 참조

20) 금용기관들의 해외영업 부실이 외채의 누적과 외환위기 발생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종합금융회사와 투자신탁회사들이 단기자금을 빌려 위험한 해외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많이 지적되고 있다. 특히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외환위기로 그 곳에 투자한 자금들의 회수가 어렵게 되면서 이들 금융기관들의 외화자금사정이 악화되고, 이것이 국내 외환사정의 악화에 기여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21)  IMF 방식에 따른 외채집계에도 우리 나라 민간기업들의 해외 현지법인이 차입한 부채는 포함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그들은 현지국의 기업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법인들이 차입할 때 대개 국내의 모기업이 보증을 서기 때문에, 이들의 차입금 역시 결국 우리 나라의 외채라고 볼 수 있다. 1997년말 현재 현지법인이 차입한 현지금융은 532억 달러에 이른다. 그런데 이 중에서 208억 달러는 역시 우리 나라 금융기간들의 해외지점에서 차입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우리 나라의 대외지불부담금 집계에 포함돼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전체적인 대외지불부담금을 계산하는데 포함시킬 수 있는 현지법인의 차입금은 이들이 외국 금융기관들에게서 빌린 324억 달러이다.

22)  1997년 8월 12일 7개 시중은행과 10개 종금사가 외화부도를 직면했으나 한국은행의 긴급지원으로 부도위기를 모면했다고 전해진다. 조갑제․부지영, “실록:IMF 사태의 내막(하),”『월간조선』(1998년 4월호). p. 124.

23)  박대근․이창용(1998:18)에서 재인용.

24) 위의 글. 국제금융권에서는 8․25 조치를 한국정부가 드디어 외환/금융위기의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이해했다. 정규재․김성택 (1998:92)

25)  민상기 교수(1998:86)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제나 대규모의 통화위기에 있어서 경제적 요인은 원인제공의 역할을 할 뿐 실제로 위기가 발생하는 데에는 정치적 상황이 더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령 비슷한 경제위기가 정권 말에 발생하지 않고 정권이 시작하던 때에 발생하여 경제전반에 대한 정부의 장악력이 있었더라면 한국도 외환위기를 지금과 같이 심하게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망도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26) 한국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요인과 관련하여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다른 사건들도 언급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대한종금이 동방페레그린증권을 인수하려는 시도, 산업은행마저 부실화될까 하는 우려 등이다. 

27)  홍콩증시 폭락 이후 외국인 매도세는 미국계에 이어 영국계가 가담하면서 더욱 가열되었다. 한국경제신문(1997. 10. 25)

28)  1999년 1월 26일 국회<IMF 환란조사 특위>에 증인으로 출석한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외환위기는 취임때부터 계속되었지만 97년 11월 이전에는 IMF로 가야 하는 정도의 환란이 올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다... 11월에서 12월까지 일본 금융기관들이 70억 달러 이상을 일시에 회수한 것이 환란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한국경제신문』1999년 1월 27일

29)  싱가포르, 홍콩, 대만이 97년 7-8월 중 환투기세력의 공격을 받았을 때 자국통화를 방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충분한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분한 외환보유고는 환율인상이 외환위기로까지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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